킨은 허무했다.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회의에 참석했건만, 뱡은 오히려 평소보다 회의를 일찍 끝냈고 킨과 관련된 별다른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킨이 내심 기대했던 상황은 벌어지지 않은 채 회의가 끝나버렸다. 물론 뱡이 문제 삼으려 했던 내용이 해소된 것은 아니므로, 때가 되면 그에 대한 언급이 반드시 있을 것이다. 킨은 뱡이 한번 더 크게 사고를 치는 그 순간을 놓치지 않겠다고 굳게 다짐했다. 지극히 이기적 인간인 뱡이 사고를 치고 다니는 것이 어제오늘 일은 아니다. 가장 최근에는 그 사고가 결국 스스로에게 화를 불러오기도 했는데, 그것은 유능하고 성격도 좋은 신임 부장을 채용한 지 두 달 만에 마음대로 해고해 버린 일이었다. 이유는 당연하게도 자기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여기서부터는 조금 딱딱한..
가로 10센티미터, 세로 2센티미터의 길쭉한 직사각형 모양으로 잘라낸 여러 장의 종이 뭉치를 쓰레기통에 버리며 킨은 슬며시 미소를 지었다. 사실 이 아이디어는 킨이 사랑해 마지않는 한 영화에서 비롯된 것이다. 영화에서는 탈옥을 준비하는 주인공이 두툼한 성경책의 안쪽을 오려내어 공간을 만들고 거기에 벽을 뚫는 작은 망치를 감춰두어 간수를 속였다. 킨도 지금 업무용 다이어리의 안쪽을 어떤 물건의 크기와 두께에 맞추어 조심스레 오려냈고, 오려낸 종이 뭉치를 다른 직원들이 눈치채지 못하도록 자기 자리의 휴지통이 아닌 밖에 있는 공용 쓰레기통에 버렸다. 킨의 업무용 다이어리 안쪽에 감춰질 물건은 바로 디지털 녹음기였다. 가로 10센티미터, 세로 2센티미터에 두께는 불과 0.5밀리미터인 이 녹음기는 다음 주 회의 ..
"쟌, 이 리모델링건 비교 견적서 필요 없을까요?" 윰이 상체를 반쯤 일으키며 물었지만 쟌은 역시나 답이 없다. "쟌! 쟌! 이 리모델링건 비교 견적서 필요 없냐구요?" 이젠 아예 일어서서 서류를 손에 들고 흔들며 보다 큰 소리로 여러 번 이름을 부르자 비로소 쟌이 반응한다. 사실 쟌은 지금 양쪽 귀에 이어폰을 끼고 온라인 교육을 수강하는 중이었다. "금액이 30만원 넘어서 비교 견적서 필요할 것 같은데요." 쟌의 대답을 듣기도 전에 윰이 재빨리 덧붙인다. 이미 말투에는 날이 잔뜩 섰다. "정해진 기준이 없으니 그렇죠? 기준을 좀 정해야 할까 봐요." 셴이 중재하려는 듯 한 마디 던져보지만 소용이 없다. "아... 업체에 비교 견적 달라고 얘기해볼게요, 안 그래도 금액이 커서 고민이었는데요." 늘 그렇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