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반기를 맞이하면서 제가 하고 싶은 말은, 우리가 소통이 부족하다, 내가 늘 하나가 되자고 얘기를 하지만 이게 잘 안 되는 것 같다..." 회의를 시작하며 뱡이 그럴듯하게 포장한 연설을 늘어놓기 시작하자, 이번엔 또 무슨 개소리를 하려고 저러나 모두들 궁금해했다. 물론 언제나 그렇듯 금세 본색이 드러났다. "내가 일주일이나 입원을 하고 수술까지 했는데, 아무도 괜찮으시냐고 묻거나 수술 잘 받고 오시라거나 하는 안부 문자도 한 통이 없더군요." 속으로 피식 웃으며 킨은 다른 직원들을 살폈다. 마스크에 가려져 보이지 않았지만 다들 어이없는 표정인 것을 눈빛으로 느낄 수 있었다. 아, 참고로 얘기하자면 이 조직은 여전히 회의가 있거나 외부에서 손님이 올 때 마스크를 쓴다. 코로나19가 독감과 같은 4등급으로..
이미 킨은 뱡에 대해 몇 가지 꾸준히 기록해두고 있는 것이 있었다. 그중 하나는 뱡의 불량한 근태에 대한 것으로, 처음에는 뱡이 퇴근하는 모습이 담긴 CCTV 화면을 캡처했는데 이것은 상당히 번거로운 일이어서 킨은 메신저에 대화방을 하나 개설했다. 대표인 뱡과 부장인 쟌을 제외하고 믿을만한 몇몇 직원들만 초대된 이 대화방에는 뱡의 출퇴근 상황을 주로 킨이 기록하고 있다. 굳이 사진이나 영상이 아니어도 꾸준히 일관되게 기록한 자료는 법정에서 증거로 채택될 수 있다는 사실을 킨은 알고 있었다. 뱡의 근태에 관해서라면 사실 직원 누구라도 할말이 많은 것이, 뱡은 자신은 대표이므로 출근이나 퇴근 중 한 번만 지문인식 인증을 하면 출근이 인정되지만, 직원들은 출근과 퇴근 모두 지문을 찍어야 한다는 내부 방침을 정..
킨은 허무했다.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회의에 참석했건만, 뱡은 오히려 평소보다 회의를 일찍 끝냈고 킨과 관련된 별다른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킨이 내심 기대했던 상황은 벌어지지 않은 채 회의가 끝나버렸다. 물론 뱡이 문제 삼으려 했던 내용이 해소된 것은 아니므로, 때가 되면 그에 대한 언급이 반드시 있을 것이다. 킨은 뱡이 한번 더 크게 사고를 치는 그 순간을 놓치지 않겠다고 굳게 다짐했다. 지극히 이기적 인간인 뱡이 사고를 치고 다니는 것이 어제오늘 일은 아니다. 가장 최근에는 그 사고가 결국 스스로에게 화를 불러오기도 했는데, 그것은 유능하고 성격도 좋은 신임 부장을 채용한 지 두 달 만에 마음대로 해고해 버린 일이었다. 이유는 당연하게도 자기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여기서부터는 조금 딱딱한..
가로 10센티미터, 세로 2센티미터의 길쭉한 직사각형 모양으로 잘라낸 여러 장의 종이 뭉치를 쓰레기통에 버리며 킨은 슬며시 미소를 지었다. 사실 이 아이디어는 킨이 사랑해 마지않는 한 영화에서 비롯된 것이다. 영화에서는 탈옥을 준비하는 주인공이 두툼한 성경책의 안쪽을 오려내어 공간을 만들고 거기에 벽을 뚫는 작은 망치를 감춰두어 간수를 속였다. 킨도 지금 업무용 다이어리의 안쪽을 어떤 물건의 크기와 두께에 맞추어 조심스레 오려냈고, 오려낸 종이 뭉치를 다른 직원들이 눈치채지 못하도록 자기 자리의 휴지통이 아닌 밖에 있는 공용 쓰레기통에 버렸다. 킨의 업무용 다이어리 안쪽에 감춰질 물건은 바로 디지털 녹음기였다. 가로 10센티미터, 세로 2센티미터에 두께는 불과 0.5밀리미터인 이 녹음기는 다음 주 회의 ..
"쟌, 이 리모델링건 비교 견적서 필요 없을까요?" 윰이 상체를 반쯤 일으키며 물었지만 쟌은 역시나 답이 없다. "쟌! 쟌! 이 리모델링건 비교 견적서 필요 없냐구요?" 이젠 아예 일어서서 서류를 손에 들고 흔들며 보다 큰 소리로 여러 번 이름을 부르자 비로소 쟌이 반응한다. 사실 쟌은 지금 양쪽 귀에 이어폰을 끼고 온라인 교육을 수강하는 중이었다. "금액이 30만원 넘어서 비교 견적서 필요할 것 같은데요." 쟌의 대답을 듣기도 전에 윰이 재빨리 덧붙인다. 이미 말투에는 날이 잔뜩 섰다. "정해진 기준이 없으니 그렇죠? 기준을 좀 정해야 할까 봐요." 셴이 중재하려는 듯 한 마디 던져보지만 소용이 없다. "아... 업체에 비교 견적 달라고 얘기해볼게요, 안 그래도 금액이 커서 고민이었는데요." 늘 그렇듯..